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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벌린 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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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벌린 워는 20세기 영국의 소설가이자 저널리스트로, 초기에는 풍자적인 작품을, 후기에는 종교적, 철학적 주제를 다룬 작품을 주로 썼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학업을 중단하고 교직 생활을 거쳐 작가로 데뷔했으며, 두 번의 결혼과 가톨릭 개종을 경험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쇠퇴와 몰락》,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 등이 있으며, 그의 작품은 날카로운 풍자와 우아한 문체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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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벌린 워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벌린 워
워, 1940년경
본명아서 에벌린 세인트 존 워
출생일1903년 10월 28일
사망일1966년 4월 10일
출생지웨스트 햄스테드, 런던, 잉글랜드
사망지콤 플로리, 서머싯, 잉글랜드
국적# 템플릿은 제거하고, 국적 정보가 명확히 드러나지 않아 보류
직업작가
학력
교육랜싱 칼리지
허트퍼드 칼리지, 옥스퍼드
작품 활동
활동 기간1923년–1964년
장르소설, 전기, 단편 소설, 여행기, 자서전, 풍자, 유머
대표 작품쇠망기 (1928년)
브라이즈헤드 재방문 (1945년)
명예의 칼 3부작 (1952-61년)
가족 관계
배우자에벌린 가드너 (1928년 결혼, 1936년 이혼 - 무효)
로라 허버트 (1937년 결혼)
자녀7명, 오번론 워 포함
발음

2. 초기 생애 및 교육

출판사 사장이자 문학 평론가인 아서 워(Arthur Waugh)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형인 알렉 워/Alec Waugh영어 역시 영화화된 『햇볕이 내리쬐는 섬』 등의 작품이 있는 소설가이다. 일족의 계보에는 시인, 문학 평론가인 에드먼드 고스/Edmund Gosse영어 등도 있다.

퍼블릭 스쿨을 거쳐 1922년, 옥스퍼드 대학교 하트퍼드 칼리지의 역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업에 전념하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보내 2년 만에 자퇴했다. 히더리 미술 학교에 입학했으나 이곳도 단기간에 퇴학했다. 잠시 교사 생활을 하면서 각지를 방랑했고, 1928년에 동명의 이블린이라는 여성과 결혼(‘이블린’은 남녀 모두에게 사용되는 이름)했다. 그해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평전을 완성함과 동시에 첫 장편 소설 『몰락기』(''Decline and Fall'')를 집필하여 두 권을 거의 동시에 간행, 문단에 데뷔했다. 『몰락기』는 대학에서 제적된 청년이 퍼블릭 스쿨 교사로 교편을 잡는 유머 소설로, 이후 『검은 장난』(1932년), 『먼지 한 줌』(1934년) 등 때로는 그로테스크해질 정도로 냉소적인 풍자를 담은 유머 작품을 발표해 나갔다.

2. 1. 가계 배경

아서 에벌린 세인트 존 워는 1903년 10월 28일에 아서 워와 캐서린 샬롯 라반 사이에서 태어났다.[3] 그의 가문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아일랜드, 위그노 출신이었다. 워 가문의 저명한 친척으로는 스코틀랜드의 주요 변호사이자 판사인 코크번 경(1779–1854), 보험 수학의 선구자였던 윌리엄 모건(1750–1833), 자연 과학자 필립 헨리 고스(1810–1888)가 있었다.[4] 런던 선교 협회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준 알렉산더 워 (1754–1827) 목사도 워 가문 출신 조상 중 한 명이었다.[5] 알렉산더 워(1840–1906)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1866년에 태어난 아서 워가 에벌린의 아버지였다.[6]

헨리 코크번 경은 워의 증조부 중 한 명이었다.


셔본 학교와 옥스퍼드 뉴 칼리지를 졸업한 아서 워는 채프먼 앤 홀(Chapman and Hall)의 전무 이사였다.[7] 그는 1893년 캐서린 라반 (1870–1954)과 결혼했으며,[8] 그들의 첫째 아들 알렉산더 라반 워는 1898년 7월 8일에 태어났다.[9] 1903년 10월 28일, 둘째 아들 에벌린이 태어났다.[10] 1904년 1월 7일, 에벌린은 아서 에벌린 세인트 존 워로 세례를 받았다.[11]

2. 2. 유년 시절

잉글리시 헤리티지(English Heritage) 블루 플라크 (blue plaque) 145번지 골더스 그린(Golders Green)의 노스 엔드 로드(North End Road), 런던


1907년, 워 가족은 힐필드 로드를 떠나 아서가 골더스 그린(Golders Green) 근처 햄스테드(Hampstead)의 노스 엔드 로드(North End Road)에 지은 언더힐로 이사했다.[12] 당시 골더스 그린은 낙농장, 채소밭, 푸른 종 모양의 꽃이 피는 숲이 있는 반 농촌 지역이었다.[13] 에벌린은 어머니로부터 집에서 첫 학교 수업을 받았는데, 어머니와 특히 친밀한 관계를 형성했다. 그의 아버지 아서 워는 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고, 큰 아들 알렉과의 친밀함 때문에 에블린은 종종 소외감을 느꼈다.[14][15]

1910년 9월, 에블린은 히스 마운트 스쿨(Heath Mount School) 예비 학교의 통학생으로 입학했다. 그는 이미 "경마의 저주"라는 첫 번째 이야기를 쓰고 완성한,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활기찬 소년이었다.[16] 그의 글쓰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은 교사 오브리 엔서였다. 워는 히스 마운트에서 비교적 만족스러운 6년을 보냈다. 그는 스스로 "꽤 영리한 어린 소년"이었고 수업에 거의 괴로움을 느끼거나 압도당하지 않았다고 말했다.[17] 신체적으로 싸움을 좋아하는 에블린은 약한 소년들을 괴롭히는 경향이 있었는데, 피해자 중 한 명이 미래의 사회 사진작가 세실 비턴이었고, 그는 그 경험을 결코 잊지 못했다.[16][18]

학교 밖에서, 그와 다른 이웃 아이들은 보통 워가 쓴 연극을 공연했다.[19] 침략 문학 장르의 책들이 조장한 외국인 혐오를 바탕으로, 독일인들이 곧 영국을 침략할 것이라는 생각에 워는 친구들을 "권총 부대"로 조직하여 요새를 짓고, 기동 훈련을 하고, 임시 제복을 입고 행진했다.[20]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후, 워와 히스 마운트 학교의 보이 스카우트 부대의 다른 소년들은 때때로 전시성(War Office)에서 심부름꾼으로 고용되었다. 에블린은 호레이쇼 키치너 경을 엿볼 희망으로 전시성 주변을 배회했지만, 결코 보지 못했다.[21]

가족 휴가는 보통 워 삼촌들과 함께 서머싯(Somerset)의 미드서머 노턴(Midsomer Norton)에서 보냈는데, 그곳은 등유 램프로 밝혀졌고, 워는 수년 후 기쁨으로 그 시절을 회상했다.[22] 미드서머 노턴에서 에블린은 고교회(high Anglican) 교회 의식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는 나중에 그의 삶에 대한 관점을 지배하게 된 영적 차원의 초기 움직임이었으며, 그는 지역 성공회 교회에서 복사로 봉사했다.[23] 히스 마운트에서 마지막 해 동안 워는 학교 잡지인 ''The Cynic''을 창간하고 편집했다.[16]

2. 3. 랜싱 칼리지

랜싱 칼리지 채플


알렉 워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셔본 학교에 다녔다. 에벌린도 셔본 학교에 다닐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1915년, 학교는 에벌린의 형인 알렉에게 동성애 관계가 드러난 후 학교를 떠나라고 요청했다.[16] 알렉은 장교 훈련을 위해 셔본을 떠났고, 임관을 기다리는 동안 학교 생활을 묘사한 소설 ''청춘의 베틀''(1917)을 썼는데, 이 소설은 셔본과 흡사한 학교에서 있었던 동성애적 우정을 암시했다. 알렉의 소설이 일으킨 대중적 파문은 학교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고, 에블린이 그곳에 가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917년 5월, 그는 매우 불쾌하게도, 그가 보기에 분명히 열등한 학교인 랜싱 칼리지로 보내졌다.[16]

워는 곧 랜싱에 대한 처음의 반감을 극복하고 정착하여 미학자로서 명성을 쌓았다. 1917년 11월 그의 에세이 "입체주의 옹호"(1917)가 예술 잡지 ''드로잉 앤 디자인''(Drawing and Design)에 게재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첫 번째 출판된 글이었다.[25] 학교 내에서 그는 학교 생도단을 조롱하고 "지루해 죽는 사람들을 위한" 시체 클럽을 창설하는 등 약간의 전복적인 행동을 했다.[26][27] 전쟁이 끝나면서 J. F. 록스버러와 같은 젊은 교사들이 학교로 돌아왔고, 그는 워에게 글을 쓰도록 격려하고 그의 훌륭한 미래를 예견했다.[28] 또 다른 멘토인 프란시스 크리스는 워에게 서예와 장식 디자인 기술을 가르쳤고, 소년의 작품 중 일부는 채프먼 앤 홀(Chapman and Hall)이 책 표지에 사용할 만큼 훌륭했다.[30]

랜싱에서 말년에 워는 하우스 캡틴, 학교 잡지 편집자, 토론 클럽 회장으로 성공을 거두었고, 수많은 예술 및 문학상을 수상했다.[16] 그는 또한 대부분의 종교적 신념을 버렸다.[31] 그는 제목 없는 학교 생활에 대한 소설을 쓰기 시작했지만 약 5,000 단어를 쓴 후 그 노력을 포기했다.[32]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 허트퍼드 칼리지에서 현대사를 전공하는 장학금을 받으면서 학교 생활을 마쳤고, 1921년 12월에 랜싱을 떠났다.[33]

3. 옥스퍼드 대학교 시절

워는 1922년 1월 옥스퍼드에 도착했다. 그는 톰 드리버그에게 "나는 여기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예배당에도 절대 가지 않습니다."라고 알렸다.[34] 그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자전거를 샀으며, 옥스퍼드 유니언에서 "이 의회는 금지를 환영한다"는 안건에 반대하며 첫 연설을 했다.[35] 워는 옥스퍼드 잡지인 ''Cherwell''과 ''Isis''에 유니언 토론에 대한 보고서를 썼고, ''Isis''의 영화 평론가로 활동했다.[36][37] 그는 또한 허트퍼드 칼리지 토론 사회의 비서가 되었다.[38] 워는 자신의 장학금을 미래의 학문적 성공을 위한 발판이 아닌 과거의 노력에 대한 보상으로 여겼지만, 첫 두 학기에 필수적인 예비 시험인 "역사 예비"를 통과했다.[39]

1922년 10월, 해럴드 액턴과 브라이언 하워드가 옥스퍼드에 도착하면서 워의 옥스퍼드 생활은 변화했다. 액턴과 하워드는 곧 아방가르드 서클인 위선자 클럽의 중심이 되었고 (워는 이 클럽의 비서였다),[40] 워는 예술적, 사회적, 동성애적 가치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였다.[41] 그는 나중에 "그곳은 내 옥스퍼드 생활의 절반을 차지하는 곳이었습니다."라고 썼다.[42] 그는 술을 많이 마시기 시작했고, 휴 라이곤, 리처드 파레스, 알래스터 그레이엄과의 관계를 포함하여 여러 동성애 관계를 시작했다.[16][43]

그는 대학 저널에 리뷰와 단편 소설을 썼고, 그래픽 아티스트로서 명성을 얻었지만, 정규적인 학업은 거의 중단되었다. C. R. M. F. 크루트웰과의 격렬한 불화는 상호 증오로 악화되었다.[45] 워는 옥스퍼드 시절 이후에도 초기 소설에서 크루트웰의 이름을 우스꽝스럽고 불명예스럽거나 혐오스러운 조연 캐릭터로 사용하면서 불화를 오랫동안 지속시켰다.[46]

워의 타락한 생활 방식은 1924년, 옥스퍼드에서의 마지막 해까지 이어졌다. 그는 1924년 여름, 3등급으로 최종 시험을 통과할 만큼 충분한 노력을 했다. 그러나 그는 1921-22학년도의 두 번째 학기에 허트퍼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워는 최종 시험을 치를 때 대학 규정에 따라 요구되는 9학기가 아닌 8학기만 마쳤다. 그의 좋지 않은 결과는 장학금 상실로 이어졌고, 그로 인해 그는 마지막 학기에 옥스퍼드로 돌아갈 수 없었고, 학위 없이 떠나게 되었다.[48]

집으로 돌아온 워는 소설 ''The Temple at Thatch''를 쓰기 시작했고, 영화 ''The Scarlet Woman''에 위선자 클럽 회원들과 함께 참여했다. 그는 여름의 나머지 기간 동안 대부분 알래스터 그레이엄과 함께 보냈고, 그레이엄이 케냐로 떠난 후 워는 가을에 런던 미술 학교인 헤더리에 등록했다.[49]

4. 초기 경력: 교직과 작가 활동

출판사 사장이자 문학 평론가인 아서 워(Arthur Waugh)의 아들로 런던에서 태어났다. 형인 Alec Waugh영어 역시 영화화된 『햇볕이 내리쬐는 섬』 등의 작품이 있는 소설가이다.

퍼블릭 스쿨을 거쳐 1922년, 옥스퍼드 대학교 하트퍼드 칼리지의 역사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업에 전념하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보내 2년 만에 자퇴했다. 히더리 미술 학교에 입학했으나 이곳도 단기간에 퇴학했다. 잠시 교사 생활을 하면서 각지를 방랑했고, 1928년에 동명의 이블린이라는 여성과 결혼(‘이블린’은 남녀 모두에게 사용되는 이름). 그해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평전을 완성함과 동시에 첫 장편 소설 『몰락기』(''Decline and Fall'')를 집필하여 두 권을 거의 동시에 간행, 문단에 데뷔했다. 『몰락기』는 대학에서 제적된 청년이 퍼블릭 스쿨 교사로 교편을 잡는 유머 소설이다.

1930년, 아내의 불륜으로 이혼하고, 이를 계기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워와 에블린 가드너가 짧은 결혼 생활 동안 살았던 캐논버리 광장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워가 처음으로 쓴 장편 도서(1927)의 주제

4. 1. 교직 생활과 습작



워는 1924년 9월 말 헤더리에서 시작했지만, 일상에 지루함을 느껴 곧 과정을 포기했다.[50] 그는 돈이 절실해지기 전까지 런던과 옥스퍼드에서 몇 주 동안 파티를 즐겼고, 직업 중개업체를 통해 교사직을 구했다. 그는 거의 즉시 1925년 1월부터 시작하는 노스 웨일스의 한 남자아이들을 위한 예비 학교인 아놀드 하우스에서 자리를 잡았다. 그는 틈틈이 소설 작업을 할 생각으로 소설 'Thatch의 사원'의 노트를 가지고 갔다. 학교의 우울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워는 자신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부활절 연휴 동안 런던과 옥스퍼드를 잠시 방문한 것은 그의 고립감을 더욱 악화시켰다.[51]

1925년 여름, 워는 스코틀랜드 작가인 C. K. 스콧 몬크리프의 비서로 이탈리아, 피사에서 일자리를 얻을 가능성이 생기면서 잠시나마 상황이 나아졌다. 몬크리프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워는 이 직업이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아놀드 하우스에서의 직책을 사임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소설 초기 챕터들을 액턴에게 보내 평가와 비판을 받았다. 액턴의 답장은 매우 냉담하여 워는 즉시 원고를 불태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노스 웨일스를 떠나기 전에 몬크리프의 직업이 무산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52] 이러한 두 번의 충격은 그가 자살을 고려하기에 충분했다. 그는 근처 해변으로 가서 옷과 함께 쪽지를 남기고 바다로 들어갔다고 기록했다. 해파리의 공격으로 마음이 바뀌어 그는 재빨리 해변으로 돌아왔다.[53]

이후 2년 동안 워는 버킹엄셔, 애스턴 클린턴의 학교에서(술에 취해 학교 여교사를 유혹하려다 해고됨)와 런던의 노팅힐에서 가르쳤다.[54] 그는 인쇄나 가구 제작 분야에서 다른 직업을 고려했고, 글을 계속 쓰면서 홀본 폴리테크닉에서 목공 야간 강좌를 들었다.[55] 실험적인 모더니즘 문학 스타일로 쓰인 단편 소설 "균형"은 1926년 채프먼 앤 홀이 "조지안 이야기"라는 선집에 포함시키면서 그의 첫 상업적 소설이 되었다.[56] 프리라파엘파에 대한 긴 에세이는 스트랫퍼드 어폰 에이번의 셰익스피어 헤드 프레스의 인쇄기를 합의 하에 사용하여 알라스테어 그레이엄에 의해 개인적으로 인쇄되었는데, 그는 그곳에서 인쇄공 훈련을 받고 있었다.[57][58] 이로 인해 출판사 더크워스와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의 장편 전기 계약을 맺게 되었고, 워는 1927년에 이를 썼다.[59] 그는 또한 코미디 소설 작업을 시작했고, 몇 개의 임시 제목을 거쳐 '쇠퇴와 몰락'이 되었다.[60][61] 그는 교직을 포기했고, 1927년 4월부터 5월까지 짧고 성공적이지 못한 기간 동안 '데일리 익스프레스'의 기자로 일한 것을 제외하고는 정기적인 고용이 없었다.[62]

4. 2. 작가 데뷔와 첫 결혼

1927년 12월, 워는 에블린 가드너와 약혼했다. 레이디 버클레어는 워에게 도덕적 기강이 부족하고 부적절한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여 반대했다.[64] 그들의 친구들 사이에서 그들은 "그-에블린"과 "그녀-에블린"으로 불렸다.[16] 워는 아버지로부터 주당 4파운드의 용돈과 서평 및 저널리즘으로 벌 수 있는 소액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65] 1928년 4월, 로세티 전기가 출판되어 호평을 받았다. J. C. 스콰이어는 ''더 옵저버''에서 책의 우아함과 재치를 칭찬했고, 레베카 웨스트는 그 책을 얼마나 즐겁게 읽었는지 편지를 써서 표현했다. 다만, ''타임스 문학 부록''에서 그를 "미스 워"라고 언급한 것은 워에게 덜 기뻤던 일이었다.[16]

''쇠퇴와 몰락''이 완성되었을 때, 덕워스는 책의 "음란성"에 반대했지만, 채프먼 앤 홀은 출판에 동의했다.[66] 워와 가드너는 1928년 6월 27일 포트먼 광장의 세인트 폴 교회에서 결혼했으며, 로버트 바이런 등만이 참석했다.[67] 부부는 이즐링턴의 캐논버리 광장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다.[68] 결혼 초 몇 달은 돈 부족과 가드너의 건강 악화로 인해 어두워졌다.[69]

1928년 9월, ''쇠퇴와 몰락''이 출판되어 거의 만장일치로 칭찬을 받았다. 12월까지 그 책은 세 번째 인쇄에 들어갔고, 미국 출판권은 500달러에 팔렸다.[70] 성공의 여운 속에서 워는 지중해 크루즈를 대가로 여행 기사를 쓰라는 의뢰를 받았고, 그와 가드너는 1929년 2월에 연장된 늦은 신혼 여행을 시작했다. 그러나 가드너가 폐렴에 걸려 포트사이드의 영국 병원으로 옮겨지면서 여행은 중단되었다. 부부는 그녀가 회복된 후 6월에 집으로 돌아왔다. 한 달 후, 가드너는 존 헤이게이트가 자신의 연인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화해 시도가 실패한 후, 워는 1929년 9월 3일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부부는 몇 년 후 결혼 무효 절차를 진행하는 동안 단 한 번 만난 것으로 보인다.[71]

4. 3. 이혼과 가톨릭 개종

1927년 12월, 워는 에블린 가드너와 약혼했는데, 가드너의 어머니인 레이디 버클레어는 워에게 도덕적 기강이 부족하고 부적절한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여 반대했다.[64] 두 사람은 친구들 사이에서 "그-에블린", "그녀-에블린"으로 불렸다.[16] 워는 아버지로부터 주당 4파운드의 용돈과 서평 및 저널리즘으로 벌 수 있는 소액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다.[65] 1928년 4월에 출판된 로세티 전기는 대체로 호평을 받았다. J. C. 스콰이어는 ''더 옵저버''에서 책의 우아함과 재치를 칭찬했고, 레베카 웨스트는 그 책을 얼마나 즐겁게 읽었는지 편지를 써서 표현했다. 타임스 문학 부록에서 그를 "미스 워"라고 언급한 것은 그에게 덜 기쁜 일이었다.[16]

채프먼 앤 홀은 워의 소설 ''쇠퇴와 몰락'' 출판에 동의했고,[66] 워와 가드너는 1928년 6월 27일 포트먼 광장의 세인트 폴 교회에서 결혼했다. 로버트 바이런등이 참석했다.[67] 부부는 이즐링턴의 캐논버리 광장에 있는 작은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다.[68]

결혼 초 몇 달은 돈 부족과 가드너의 건강 악화로 인해 어두워졌다.[69] 1928년 9월, ''쇠퇴와 몰락''이 출판되어 거의 만장일치로 칭찬을 받았고, 12월까지 세 번째 인쇄에 들어갔으며, 미국 출판권은 500달러에 팔렸다.[70] 성공의 여운 속에서 워는 무료 지중해 크루즈를 대가로 여행 기사를 쓰라는 의뢰를 받았고, 그와 가드너는 1929년 2월에 연장된 늦은 신혼 여행을 시작했다. 가드너가 폐렴에 걸려 포트사이드의 영국 병원으로 옮겨지면서 여행은 중단되었다.[71]

가드너가 회복된 후 1929년 6월에 집으로 돌아왔으나, 한 달 후, 가드너는 존 헤이게이트가 자신의 연인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화해 시도가 실패한 후, 워는 1929년 9월 3일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71] 1930년 9월 29일, 워는 가톨릭 교회에 입교했다. 이는 그의 가족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일부 친구들을 놀라게 했지만, 그는 오랫동안 이 단계를 고려해 왔다.[76] 그는 랜싱에서 성공회를 잃었고 옥스퍼드에서 불경건한 삶을 살았지만, 1920년대 중반부터 종교적인 논의와 정기적인 교회 출석에 대한 언급이 그의 일기에 나타난다. 워는 1925년에 개종한 그의 친구 올리비아 플런켓-그린의 영향을 받았으며, 워는 후에 "그녀는 나를 교회로 몰아넣었다"고 썼다.[79] 그녀는 그를 예수회의 마틴 다시 신부에게 인도했고, 마틴 다시 신부는 워에게 "확고한 지적 신념은 있었지만 감정은 거의 없었다"고 설득하여 "기독교 계시는 진실이었다"고 믿게 했다.[79] 1949년, 워는 자신의 개종은 삶이 "신 없이 이해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이루어졌다고 설명했다.[80]

5. 작가 및 저널리스트 활동

워의 첫 번째 전기 작가인 크리스토퍼 사이크스는 이혼 후 친구들이 워의 관점에 "새로운 강인함과 쓰라림을 보았거나 그렇게 믿었다"고 기록했다.[72] 그럼에도 불구하고, 액턴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그렇게 비참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몰랐다"고 썼지만,[73] 그는 곧 그의 직업적 및 사회적 삶을 재개했다. 그는 두 번째 소설인 ''타락한 육신''을 완성했고,[16]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결혼식의 의미에 대한 데일리 메일 기사를 포함한 기사를 썼다.[16] 이 기간 동안 워는 친구들의 다양한 집에서 머무는 관행을 시작했다. 그는 앞으로 8년 동안 정착된 집을 갖지 못했다.[16]

1920년대의 브라이트 영 피플을 풍자한 ''타락한 육신''은 1930년 1월 19일에 출판되었으며 워의 첫 번째 주요 상업적 성공이었다. 준성경적인 제목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어둡고 쓰라리며, 전기 작가 마틴 스탠나드는 "환멸의 선언"이라고 묘사했다.[74]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워는 이제 그의 저널리즘에 대한 더 큰 원고료를 요구할 수 있었다.[75] 그는 더 그래픽, 타운 앤 컨트리하퍼스 바자에서 정기적으로 일하면서 셰-에블린과의 신혼 여행에 대한 객관적인 기록인 ''라벨스''를 빠르게 썼다.[16]

5. 1. 여행과 작품 활동

1930년 10월 10일, 워는 여러 신문을 대표하여 에티오피아로 떠나 하이레 셀라시에의 대관식을 취재했다. 그는 이 행사를 에티오피아가 야만적인 수단을 통해 권력을 잡았다는 사실을 숨기고 세계에 에티오피아가 문명화된 국가임을 설득하려는 "정교한 선전 노력"이라고 보고했다.[81] 이후 영국령 동아프리카 식민지와 벨기에령 콩고를 여행한 것은 두 권의 책의 토대가 되었는데, 여행기 《먼 사람들》(1931)과 코믹 소설 《블랙 미치프》(1932)이다.[82]

하이레 셀라시에 황제


1932-1933년 겨울, 워는 남아메리카의 영국령 가이아나 (현재 가이아나)로 여행을 떠났다. 조지타운에 도착한 워는 증기선을 타고 내륙으로 가는 강 여행을 준비했다. 그는 여러 기착지를 거쳐 브라질의 보아 비스타로 이동한 후, 조지타운으로 돌아오는 복잡한 육로 여행을 했다.[84] 그의 모험과 만남은 여행기 《92일》과 소설 《먼지 한 줌》에 담겨 1934년에 출판되었다.[85]

남아메리카에서 돌아온 워는 가톨릭 저널 《더 태블릿》으로부터 《블랙 미치프》의 구절에 대한 외설 및 신성 모독 혐의를 받았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대주교인 추기경 프랜시스 본에게 보낸 공개 서한으로 자신을 변호했지만,[86] 1980년까지 출판되지 않았다.

1934년 여름, 그는 북극의 스피츠베르겐으로 탐험을 떠났지만, 문학적으로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87] 1935년에는 예수회 순교자 에드먼드 캠피언을 대상으로 한 전기를 출판하여 호손덴 상을 수상했다.[88][89]

1935년 8월, 워는 《데일리 메일》을 위해 제2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의 개전 초기 단계를 보도하기 위해 에티오피아로 돌아갔다.[90] 워는 에티오피아를 "무솔리니가 잘 길들이고 있는 야만적인 곳"이라고 생각했다.[90] 그러나 임박한 이탈리아 공습에 직면하여 워의 용기는 "매우 안심이 되었다"고 동료 기자 윌리엄 디디스는 말했다.[93] 워는 에티오피아에서의 경험을 《에티오피아의 워》(1936)로 썼는데, 로즈 매컬리는 친이탈리아적 어조 때문에 "파시스트 팸플릿"이라고 일축했다.[94] 그의 소설 《특종》(1938)은 윌리엄 부트를 디디스를 느슨하게 모델로 했다.[95]

워의 친구들 중에는 《음란한 육체》의 헌정자인 다이애나 기네스와 브라이언 기네스, 레이디 다이애나 쿠퍼와 남편 더프 쿠퍼,[96] 낸시 미트포드,[97] 라이곤 자매가 있었다.[98] 1933년 그리스 섬 크루즈에서 그는 오브리 허버트의 장녀인 가브리엘 허버트를 만났고, 포르토피노에 있는 허버트 가족의 빌라에 초대받아 가브리엘의 17세 여동생 로라를 처음 만났다.[99]

5. 2. 두 번째 결혼과 가정 생활

에벌린 워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후, 에블린 가드너가 살아있는 동안 재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100] 하지만 그는 아내와 자녀를 원했고, 1933년 10월 "진정한 동의 부족"을 이유로 교회 재판소를 통해 결혼 무효 소송을 제기했다.[100] 런던에서 재판이 진행되었으나, 로마에 서류 제출이 늦어지면서 1936년 7월 4일에야 무효 결정이 내려졌다.[100] 그 사이 워는 포르토피노에서 처음 만난 로라 허버트와 사랑에 빠졌고,[101] 1936년 봄에 그녀에게 청혼했다.[102] 허버트 가문은 귀족 가톨릭 가문이었기에 처음에는 우려를 표했고, 로라 허버트가 에블린 가드너의 사촌이라는 점도 걸림돌이었다.[16] 그러나 가족들의 반대를 극복하고 1937년 4월 17일, 런던 워릭 스트리트에 있는 성모 승천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103]

결혼 후, 신부의 할머니는 글로스터셔주 스틴치콤 근처의 시골집 피어스 코트를 선물했고,[104] 부부는 그곳에서 가정을 꾸렸다. 이들 부부는 슬하에 일곱 자녀를 두었으나, 그중 한 명은 유아기에 사망했다.[105] 1938년 3월 9일에는 첫 딸 마리아 테레사가, 1939년 11월 17일에는 아들 오베론 알렉산더가 태어났다.[105]

6.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워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과 함께 1939년 9월 1일 피어스 코트를 떠나 어린 가족과 함께 서머셋의 픽스턴 공원으로 이사했다. 허버트 가문의 시골 저택에서 그는 군 입대를 모색했다.[108] 12월에 로열 해병대에 임관하여 켄트주 채텀 해군 기지에서 훈련을 받았다.[110] 1940년 4월, 그는 잠시 대위로 진급하여 해병대 중대를 지휘하게 되었지만, 부하들에게 거만하고 퉁명스러워서 인기가 없는 장교였다.[113]

프랑스 공방전 (1940년 5월 10일 - 6월 22일) 이후에도 그의 대대는 작전에 투입되지 않았다.[114] 워는 연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곧 지휘권을 잃고 대대의 정보 장교가 되었다. 그 역할에서 그는 마침내 자유 프랑스군비시 프랑스 식민 정부를 전복하고 샤를 드골 장군을 세우려는 시도를 지원하기 위해 1940년 8월 서아프리카에서 다카르 전투 (1940년 9월 23일 - 25일)에 파견된 영국군의 일환으로 메이스 작전에 참전했다. 메이스 작전은 안개와 도시 방어 시설에 대한 잘못된 정보로 인해 실패했고, 영국군은 9월 26일에 철수했다. 이 사건에 대한 워의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명예를 잃고 유혈 사태를 피했다."[115][116]

1940년 11월, 워는 코만도 부대에 배치되었고, 추가 훈련을 받은 후 로버트 레이콕 대령(후에 준장) 휘하의 "레이포스"의 일원이 되었다.[16] 1941년 2월, 부대는 지중해로 항해하여 리비아 해안의 바르디아 습격을 재탈환하려는 시도에 실패했다.[117] 5월, 레이포스는 크레타 섬의 철수를 지원해야 했다. 워는 무질서와 기강 해이, 그리고 그가 보기에 철수하는 병사들의 비겁함에 충격을 받았다.[118]

1942년 6월 10일, 로라는 부부의 네 번째 자녀인 마가렛을 낳았다.[121] 워는 그의 전출에 대한 기쁨이 곧 환멸로 바뀌었는데, 그가 현역 복무 기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3년 6월 26일, 그의 부친의 죽음과 가족 문제 처리의 필요성으로 인해 그는 허스키 작전(1943년 7월 9일 – 8월 17일)의 일환으로 그의 여단과 함께 북아프리카로 떠나지 못했다.[123] 그의 비군사적이고 반항적인 성격은 그를 효과적으로 군인으로 쓸모없게 만들었다.[124]

윈저의 연대 병영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낸 후, 워는 체셔의 태튼 공원에서 낙하산 훈련을 시작했지만, 훈련 중 부자연스럽게 착지하여 비골이 골절되었다. 1944년 1월 31일, 그는 은둔해서 작업할 수 있는 데번의 채그퍼드로 떠났고, 그의 명백한 가톨릭 소설 중 첫 번째인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 찰스 라이더 대위의 성스러운 & 세속적인 추억''(1945)을 썼다.[125]

1944년 6월 복귀 직후 그는 랜돌프 처칠에 의해 유고슬라비아로 파견되는 맥클린 임무에 참여하도록 모집되었고, 7월 초, 처칠과 함께 이탈리아 바리에서 크로아티아의 비스 섬으로 비행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연합국의 지원을 받아 점령 추축국 세력에 대항하는 게릴라전을 이끌고 있던 티토 원수, 공산주의 지도자를 만났다.[127]

임무는 결국 토푸스코에 도착하여 버려진 농가에 자리를 잡았다. 영국 육군과 공산주의 유격대 사이의 연락 임무는 가벼웠다. 워는 공산주의가 이끄는 유격대에 대해 거의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고 티토를 경멸했다. 그의 주요 관심사는 크로아티아의 가톨릭 교회의 복지였다.[129] 그는 "해방된 크로아티아의 교회와 국가"라는 긴 보고서에서 그러한 생각을 표현했다. 두브로브니크와 로마에서의 시간을 보낸 후, 워는 1945년 3월 15일 런던으로 돌아와 그의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는 현재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인 티토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외무부에서 억압했다.[130]

7. 전후 활동

1945년 5월, 런던에서 ''브라이즈헤드 저택으로''가 출판되었다.[131] 워는 이 책의 가치를 확신하며 "내 마지막 소설이 아닌 첫 번째 소설"이라고 했다.[132] 이 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저자에게 명성과 재산, 문학적 지위를 가져다주었다.[16] 워는 윈스턴 처칠과 그의 보수당1945년 총선에서 패배한 것에 잠시 기쁨을 느꼈지만, 그는 노동당의 집권을 야만주의의 승리와 새로운 "암흑 시대"의 도래로 보았다.[16]

성 헬레나, 워의 1950년 소설의 주제


1945년 9월, 군대에서 제대 후 그는 가족과 함께 피어스 코트로 돌아왔다.[134] 그러나 그 후 7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런던에서 보내거나 여행을 했다. 1946년 3월,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을 방문했고, 그해 말에는 국제법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의 사망 40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스페인에 갔다.[135] 워는 전후 유럽 여행의 좌절에 대한 경험을 단편 소설 ''스콧-킹의 모던 유럽''에 담아냈다.[136] 1947년 2월, 그는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했고, ''브라이즈헤드''의 영화 제작에 대해 논의했다.[16] 1951년에는 성지를 방문했고,[137] 1953년에는 고아로 여행을 갔다.[138][139]

워는 "내가 지금까지 썼거나 앞으로 쓸 최고의 책"인 진정한 십자가를 발견한 사람에 대한 오랫동안 계획했던 소설인 ''헬레나''에 간헐적으로 작업을 했다. 이 책은 대중에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의 딸 해리엇은 "그가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좋아했던 그의 책 중 유일한 책"이라고 말했다.[140]

1952년, 워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전쟁 초기 단계의 만남을 묘사한 반자전적인 전쟁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무기들''을 출판했다.[141] 이 기간 동안 출판된 다른 책으로는 그의 전전 여행기를 엮은 선집인 ''시절이 좋았을 때''(1946),[16] 디스토피아 소설인 ''폐허 속의 사랑''(1953)이 있다.[142]

1945년부터 워는 빅토리아 시대의 그림과 가구를 수집했다. 그는 런던의 포토벨로 마켓과 가구 정리 판매에서 구입한 물건들로 피어스 코트를 채웠다.[16] 1946년 8월 30일 그의 일기에는 글로스터를 방문하여 여러 물건들을 구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44] 그의 구매 중 일부는 현명하고 선견지명이 있었다. 그는 로세티의 "무지개의 정신"을 10파운드에 구입하여 결국 큰 가치를 갖게 된 빅토리아 시대 그림 컬렉션을 시작했다.[145] 워는 또한 1949년부터 회화에 대한 해박한 리뷰와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146]

워는 전출에 대한 기쁨이 곧 환멸로 바뀌었는데, 현역 복무 기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3년 6월 26일, 부친의 죽음과 가족 문제로 허스키 작전에 참전하지 못했다.[123] 그의 비군사적이고 반항적인 성격은 그를 효과적인 군인으로 쓸모없게 만들었다.[124] 윈저의 연대 병영에서 시간을 보낸 후, 태튼 공원에서 낙하산 훈련을 받다가 비골이 골절되었다. 1944년 1월 31일, 그는 3개월의 무급 휴가를 받아 데번의 채그퍼드에서 소설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 찰스 라이더 대위의 성스러운 & 세속적인 추억''(1945)을 집필했다.[125] 이 소설은 그의 작가적 소명의 새로운 감각을 확인시켜 주었다.[126]

1944년 6월, 휴가를 연장한 그는 랜돌프 처칠의 권유로 유고슬라비아 맥클린 임무에 참여, 7월 초 바리에서 비스 섬으로 비행하여 티토 원수를 만났다.[127] 워와 처칠은 유고슬라비아로 돌아가던 중 비행기 불시착으로 부상을 입어 임무가 지연되었다.[128] 토푸스코에 도착하여 임무를 시작했지만, 워는 공산주의 유격대와 티토에게 거의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크로아티아 가톨릭 교회의 복지에 관심을 가졌고, "해방된 크로아티아의 교회와 국가"라는 보고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두브로브니크와 로마를 거쳐 1945년 3월 15일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외무부는 티토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 이를 억압했다.[130]

1953년, 작가로서 워의 인기는 하락하고, 원고료는 더 이상 쉽게 얻을 수 없었다.[16] 건강 악화와 자금 부족으로 그는 1953년 11월 영국 방송 공사(BBC) 라디오 인터뷰에 응했지만, 패널들의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148] 피터 플레밍은 《스펙테이터》에서 인터뷰를 "투우사가 황소를 몰아가는 것"에 비유했다.[149] 1954년 초, 건강 악화를 우려한 의사들의 권유로 실론으로 떠났지만, 약물 부작용으로 환각 증세를 겪었다.[150] 그는 브로민 중독 진단을 받고 약물 치료를 통해 회복했으며, 이 경험은 《길버트 핀폴드의 시련》(1957)에서 소설화되었다.[152]

콤 플로리, 1956년 워와 그의 가족이 이사한 서머싯의 마을


1956년, 에드윈 뉴먼은 워에 대한 단편 영화를 제작했는데, 워는 현대 세계를 혐오하며 과거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현대적인 운송, 통신 수단을 싫어했고, 운전을 거부했으며, 전화도 사용하지 않고, 구식 만년필로 글을 썼다. 또한 미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냈다.[154]

건강 회복 후, ''장교와 신사들''을 마무리한 그는 1955년 낸시 스페인의 무단 방문 사건으로 피어스 코트를 팔고 1956년 말 콤 플로리 하우스로 이사했다.[157] 1957년 1월, 워는 스페인과 ''익스프레스''로부터 명예훼손 손해 배상을 받았다.[158] ''길버트 핀폴드'' 출판 후, 로널드 녹스의 전기를 집필했으며, 아들 오브론의 부상에도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161]

그의 지출 수준은 돈 문제와 세금 청구가 반복되는 특징이었다.[16] 1950년 절세를 위해 자녀들을 위한 신탁 기금을 설립했고, 신탁에 가정용품을 청구하거나 자신의 소유물을 판매하여 재정을 늘렸다.[162] 1960년, CBE를 거절하고[164], 존 프리먼이 진행하는 BBC 텔레비전 인터뷰에 응했다.[163] 1961년, 전쟁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무조건 항복''을 출판했다.[166]

60대에 접어들면서 워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조기에 늙어 "뚱뚱하고, 귀가 먹고, 숨이 차는" 상태였다고 페티는 말했다.[167] 그의 전기 작가 마틴 스탠너드는 이 시기의 그의 모습을 "술로 기운을 차린 지친 악당"에 비유했다.[168] 1962년 워는 자서전 작업을 시작했고, 같은 해에 마지막 소설인 단편 소설 ''배질 실 다시 타다''(Basil Seal Rides Again)를 썼다. 1964년에 자서전 제1권 ''약간의 배움''(A Little Learning)이 출판되었다.[171]

워는 1958년 교황 요한 23세(Pope John XXIII)의 즉위를 환영했고,[172] 1963년 교황의 죽음에 대한 감사의 글을 썼다.[173] 그러나 그는 1962년 10월 교황 요한이 소집하고 그의 후계자 교황 바오로 6세(Pope Paul VI)까지 이어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나온 결정에 대해 점점 더 우려하게 되었다. 워는 교회의 개혁에 강력히 반대하며, 보편적인 라틴 미사가 자국어로 대체되는 것에 특히 고통스러워했다.[174]

1965년,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 신탁의 조건에 명백한 결함이 있어 새로운 재정 위기가 발생했고, 막대한 세금이 요구되었다. 워의 에이전트 A. D. 피터스는 세무 당국과 관리 가능한 금액으로 합의를 보았지만,[178] 자금을 마련하려는 그의 관심 속에서 워는 교황청 역사, 십자군에 대한 삽화가 있는 책, 자서전 제2권 등 여러 책을 쓰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워의 신체적, 정신적 쇠퇴는 이러한 프로젝트에 대한 작업을 방해했고, 계약은 취소되었다.[179] 그는 자신을 "이빨 없고, 귀먹고, 우울하고, 다리가 떨리고, 먹을 수 없고, 마약에 쩔어 있고, 게으르다"라고 묘사했으며[180] "모든 운명은 죽음보다 더 나쁘다"는 믿음을 표현했다.[181]

1966년 4월 10일 부활절에 가족들과 함께 인근 마을에서 라틴 미사에 참석한 후, 워는 62세의 나이로 콤 플로리 성 베드로 & 성 바울 교회(Church of St Peter & St Paul, Combe Florey)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는 특별한 arrangement에 따라 콤 플로리 성 베드로 & 성 바울 교회(Church of St Peter & St Paul, Combe Florey)의 앵글리칸 교회 묘지 밖의 헌정된 부지에 묻혔다.[183] 진혼 미사(Requiem Mass)가 1966년 4월 21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Westminster Cathedral)에서 거행되었다.[184]

워의 무덤, 앵글리칸 교회 묘지 옆에 있지만 안에는 없음.

7. 1. 명성과 성공

1945년 5월, 런던에서 ''브라이즈헤드 revisited''가 출판되었다.[131] 워는 이 책의 가치를 확신하며 "내 마지막 소설이 아닌 첫 번째 소설"이라고 했다.[132] 이 책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저자에게 명성과 재산, 문학적 지위를 가져다주었다.[16] 워는 윈스턴 처칠과 그의 보수당1945년 총선에서 패배한 것에 잠시 기쁨을 느꼈지만, 그는 노동당의 집권을 야만주의의 승리와 새로운 "암흑 시대"의 도래로 보았다.[16]

1945년 9월, 군대에서 제대 후 그는 가족과 함께 피어스 코트로 돌아왔다.[134] 그러나 그 후 7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런던에서 보내거나 여행을 했다. 1946년 3월, 그는 뉘른베르크 재판을 방문했고, 그해 말에는 국제법의 창시자로 여겨지는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의 사망 40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스페인에 갔다.[135] 워는 전후 유럽 여행의 좌절에 대한 경험을 단편 소설 ''스콧-킹의 모던 유럽''에 담아냈다.[136] 1947년 2월, 그는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했고, ''브라이즈헤드''의 영화 제작에 대해 논의했다.[16] 1951년에는 성지를 방문했고,[137] 1953년에는 고아로 여행을 갔다.[138][139]

워는 "내가 지금까지 썼거나 앞으로 쓸 최고의 책"인 진정한 십자가를 발견한 사람에 대한 오랫동안 계획했던 소설인 ''헬레나''에 간헐적으로 작업을 했다. 이 책은 대중에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의 딸 해리엇은 "그가 소리 내어 읽는 것을 좋아했던 그의 책 중 유일한 책"이라고 말했다.[140]

1952년, 워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전쟁 초기 단계의 만남을 묘사한 반자전적인 전쟁 3부작의 첫 번째 작품인 ''무기들''을 출판했다.[141] 이 기간 동안 출판된 다른 책으로는 그의 전전 여행기를 엮은 선집인 ''시절이 좋았을 때''(1946),[16] 디스토피아 소설인 ''폐허 속의 사랑''(1953)이 있다.[142]

1945년부터 워는 빅토리아 시대의 그림과 가구를 수집했다. 그는 런던의 포토벨로 마켓과 가구 정리 판매에서 구입한 물건들로 피어스 코트를 채웠다.[16] 1946년 8월 30일 그의 일기에는 글로스터를 방문하여 여러 물건들을 구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44] 그의 구매 중 일부는 현명하고 선견지명이 있었다. 그는 로세티의 "무지개의 정신"을 10파운드에 구입하여 결국 큰 가치를 갖게 된 빅토리아 시대 그림 컬렉션을 시작했다.[145] 워는 또한 1949년부터 회화에 대한 해박한 리뷰와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146]

7. 2. 여행과 후기 작품

워는 전출에 대한 기쁨이 곧 환멸로 바뀌었는데, 현역 복무 기회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3년 6월 26일, 부친의 죽음과 가족 문제로 허스키 작전에 참전하지 못했다.[123] 그의 비군사적이고 반항적인 성격은 그를 효과적인 군인으로 쓸모없게 만들었다.[124] 윈저의 연대 병영에서 시간을 보낸 후, 태튼 공원에서 낙하산 훈련을 받다가 비골이 골절되었다. 1944년 1월 31일, 그는 3개월의 무급 휴가를 받아 데번의 채그퍼드에서 소설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 찰스 라이더 대위의 성스러운 & 세속적인 추억''(1945)을 집필했다.[125] 이 소설은 그의 작가적 소명의 새로운 감각을 확인시켜 주었다.[126]

1944년 6월, 휴가를 연장한 그는 랜돌프 처칠의 권유로 유고슬라비아 맥클린 임무에 참여, 7월 초 바리에서 비스 섬으로 비행하여 티토 원수를 만났다.[127] 워와 처칠은 유고슬라비아로 돌아가던 중 비행기 불시착으로 부상을 입어 임무가 지연되었다.[128] 토푸스코에 도착하여 임무를 시작했지만, 워는 공산주의 유격대와 티토에게 거의 동정심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크로아티아 가톨릭 교회의 복지에 관심을 가졌고, "해방된 크로아티아의 교회와 국가"라는 보고서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두브로브니크와 로마를 거쳐 1945년 3월 15일 런던으로 돌아온 그는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외무부는 티토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 이를 억압했다.[130]

1953년, 작가로서 워의 인기는 하락하고, 원고료는 더 이상 쉽게 얻을 수 없었다.[16] 건강 악화와 자금 부족으로 그는 1953년 11월 영국 방송 공사(BBC) 라디오 인터뷰에 응했지만, 패널들의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148] 피터 플레밍은 《스펙테이터》에서 인터뷰를 "투우사가 황소를 몰아가는 것"에 비유했다.[149] 1954년 초, 건강 악화를 우려한 의사들의 권유로 실론으로 떠났지만, 약물 부작용으로 환각 증세를 겪었다.[150] 그는 브로민 중독 진단을 받고 약물 치료를 통해 회복했으며, 이 경험은 《길버트 핀폴드의 시련》(1957)에서 소설화되었다.[152]

1956년, 에드윈 뉴먼은 워에 대한 단편 영화를 제작했는데, 워는 현대 세계를 혐오하며 과거에 태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는 현대적인 운송, 통신 수단을 싫어했고, 운전을 거부했으며, 전화도 사용하지 않고, 구식 만년필로 글을 썼다. 또한 미국인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드러냈다.[154]

건강 회복 후, ''장교와 신사들''을 마무리한 그는 1955년 낸시 스페인의 무단 방문 사건으로 피어스 코트를 팔고 1956년 말 콤 플로리 하우스로 이사했다.[157] 1957년 1월, 워는 스페인과 ''익스프레스''로부터 명예훼손 손해 배상을 받았다.[158] ''길버트 핀폴드'' 출판 후, 로널드 녹스의 전기를 집필했으며, 아들 오브론의 부상에도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161]

그의 지출 수준은 돈 문제와 세금 청구가 반복되는 특징이었다.[16] 1950년 절세를 위해 자녀들을 위한 신탁 기금을 설립했고, 신탁에 가정용품을 청구하거나 자신의 소유물을 판매하여 재정을 늘렸다.[162] 1960년, CBE를 거절하고[164], 존 프리먼이 진행하는 BBC 텔레비전 인터뷰에 응했다.[163] 1961년, 전쟁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무조건 항복''을 출판했다.[166]

7. 3. 건강 악화와 죽음

60대에 접어들면서 워는 건강이 좋지 않았고, 조기에 늙어 "뚱뚱하고, 귀가 먹고, 숨이 차는" 상태였다고 페티는 말했다.[167] 그의 전기 작가 마틴 스탠너드는 이 시기의 그의 모습을 "술로 기운을 차린 지친 악당"에 비유했다.[168] 1962년 워는 자서전 작업을 시작했고, 같은 해에 마지막 소설인 단편 소설 ''배질 실 다시 타다''(Basil Seal Rides Again)를 썼다. 1964년에 자서전 제1권 ''약간의 배움''(A Little Learning)이 출판되었다.[171]

워는 1958년 교황 요한 23세(Pope John XXIII)의 즉위를 환영했고,[172] 1963년 교황의 죽음에 대한 감사의 글을 썼다.[173] 그러나 그는 1962년 10월 교황 요한이 소집하고 그의 후계자 교황 바오로 6세(Pope Paul VI)까지 이어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나온 결정에 대해 점점 더 우려하게 되었다. 워는 교회의 개혁에 강력히 반대하며, 보편적인 라틴 미사가 자국어로 대체되는 것에 특히 고통스러워했다.[174]

1965년, "세이브 더 칠드런"(Save the Children) 신탁의 조건에 명백한 결함이 있어 새로운 재정 위기가 발생했고, 막대한 세금이 요구되었다. 워의 에이전트 A. D. 피터스는 세무 당국과 관리 가능한 금액으로 합의를 보았지만,[178] 자금을 마련하려는 그의 관심 속에서 워는 교황청 역사, 십자군에 대한 삽화가 있는 책, 자서전 제2권 등 여러 책을 쓰기로 계약을 체결했다. 워의 신체적, 정신적 쇠퇴는 이러한 프로젝트에 대한 작업을 방해했고, 계약은 취소되었다.[179] 그는 자신을 "이빨 없고, 귀먹고, 우울하고, 다리가 떨리고, 먹을 수 없고, 마약에 쩔어 있고, 게으르다"라고 묘사했으며[180] "모든 운명은 죽음보다 더 나쁘다"는 믿음을 표현했다.[181]

1966년 4월 10일 부활절에 가족들과 함께 인근 마을에서 라틴 미사에 참석한 후, 워는 62세의 나이로 콤 플로리 성 베드로 & 성 바울 교회(Church of St Peter & St Paul, Combe Florey)에서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그는 특별한 arrangement에 따라 콤 플로리 성 베드로 & 성 바울 교회(Church of St Peter & St Paul, Combe Florey)의 앵글리칸 교회 묘지 밖의 헌정된 부지에 묻혔다.[183] 진혼 미사(Requiem Mass)가 1966년 4월 21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Westminster Cathedral)에서 거행되었다.[184]

8. 작품의 주제와 스타일

와이키스는 워의 소설이 그의 삶의 주요 사건을 되풀이하고 소설화한다고 말하지만, 워는 초기 에세이에서 "소설가에게 그가 관찰한 것을 단순히 베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가정하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것은 없다."라고 썼다.[16] 독자는 작가가 그의 소설 속 등장인물이 표현하는 의견에 동의한다고 추정해서는 안 된다.[207]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 파스터나크 슬레이터는 『완전 단편 소설』 서문에서 "사회적 편견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의 묘사는 워가 동시대 세계를 세심하게 관찰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평론가 클라이브 제임스는 워에 대해 "누구도 그보다 더 자연스럽고 우아한 영어를 썼을 리 없다... 수백 년에 걸친 꾸준한 발전이 그에게서 절정에 달했다"고 말했다.[208] 문학 평론가 앤드류 마이클 로버츠는 그의 재능이 발전하고 성숙해지면서 "우스꽝스러운 감각과 잘못된 태도를 드러내는 훌륭한 재능"을 유지했다고 말했다.[209]

40년에 걸친 그의 작가 경력의 초기 단계에서, 1930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까지, 워는 밝은 젊은이들 세대의 소설가였다. 그의 첫 두 소설인 『쇠퇴와 몰락』 (1928)과 『사악한 육체』 (1930)는 독자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너무나 환상적인 상황에서 평면적이고 기본적으로 믿을 수 없는 등장인물들로 채워진 헛된 사회를 희극적으로 반영한다.[210] 초기 소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워의 특징은 참여자를 쉽게 식별할 수 있는 빠르고 출처가 불분명한 대화이다.[16] 동시에 워는 "전쟁과 젊은 세대"와 같은 진지한 에세이를 썼는데, 그는 자신의 세대를 "미치고 불임한" 사람들로 비난했다.[211]

워의 가톨릭 개종은 그의 다음 두 소설인 『검은 혼돈』 (1934)과 『한 줌의 먼지』 (1934)의 성격을 눈에 띄게 바꾸지는 않았지만, 후자 소설에서는 광대극의 요소가 억제되었고 주인공 토니 라스트는 코믹한 암호라기보다는 인식할 수 있는 인물이다.[16] 가톨릭을 주제로 한 워의 첫 소설은 미사의 불변성에 관한 단편 소설 "심해에서" (1933)였다.[212] 1930년대 중반부터 그는 『스코프』(1938)로 이전 방식을 되돌리기 전에 언론인과 저널리즘에 관한 소설이었다.[214]

『중단된 작업과 기타 이야기』에서 워는 "진짜" 등장인물과 1인칭 화자를 도입하여 몇 년 후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에서 채택할 문학적 스타일을 예고했다.[215] 신 없이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질문하는 『브라이즈헤드』는 에블린 워가 그의 보수적인 종교적, 정치적 견해를 명확하게 제시한 첫 번째 소설이다.[16] ''라이프'' 잡지 기사 "팬들의 환호" (1946)에서 워는 "등장인물을 순수한 추상으로 만들어서 [소설에서] 신을 제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고, 그의 미래 소설은 "나에게는 오직 한 가지만을 의미하는 인간을 더 완전하게 표현하려는 시도, 즉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표현하는 시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216] 이처럼 소설 『헬레나』 (1950)는 에블린 워의 가장 철학적인 기독교 서적이다.[217]

『브라이즈헤드』에서 프롤레타리아 하급 장교 호퍼는 워의 전후 소설에서 지속되는 주제, 즉 "평범한 사람들의 시대"에서 평범함의 부상을 보여준다.[16] 3부작 『명예의 칼』(『군인들』, 1952; 『장교와 신사』, 1955; 『무조건적인 항복』, 1961)에서 평범함의 사회적 만연함은 기교로 승리하는 슬로벤이자 사기꾼인 반 코믹 캐릭터 "트리머"에 의해 의인화된다.[218] 소설 『스콧-킹의 현대 유럽』 (1947)에서 워의 미래에 대한 비관론은 "나는 소년을 현대 세계에 적합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매우 사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교사의 훈계에 담겨 있다.[219] 마찬가지로, 이러한 냉소주의는 안락사가 정부의 사회 서비스에서 가장 많이 요구되는 사회적으로 불쾌한 유토피아적 복지 국가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폐허 속의 사랑』 (1953)에도 스며들어 있다.[220] 전후 소설 중 페티는 『길버트 핀폴드의 시련』 (1957)이 "일종의 가짜 소설, 게임에 대한 교활한 초대"로 눈에 띈다고 말한다.[16] 워의 마지막 소설 "바실 실은 다시 달린다" (1962)는 전전 소설의 등장인물을 특징으로 한다. 워는 이 작품이 "청년기의 방식을 되찾으려는 노년의 시도"라고 인정했다.[221] 문체적으로 이 마지막 이야기는 1926년의 첫 번째 이야기 "균형"과 마찬가지로 "무차별적인 대화의 일제 사격"으로 시작한다.[222]

8. 1. 초기 풍자 소설

와이키스는 워의 소설이 그의 삶의 주요 사건을 되풀이하고 소설화한다고 말하지만, 워는 초기 에세이에서 "소설가에게 그가 관찰한 것을 단순히 베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가정하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것은 없다."라고 썼다.[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 파스터나크 슬레이터는 『완전 단편 소설』 서문에서 "사회적 편견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의 묘사는 워가 동시대 세계를 세심하게 관찰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평론가 클라이브 제임스는 워에 대해 "누구도 그보다 더 자연스럽고 우아한 영어를 썼을 리 없다... 수백 년에 걸친 꾸준한 발전이 그에게서 절정에 달했다"고 말했다.[208] 문학 평론가 앤드류 마이클 로버츠는 그의 재능이 발전하고 성숙해지면서 "우스꽝스러운 감각과 잘못된 태도를 드러내는 훌륭한 재능"을 유지했다고 말했다.[209]

40년에 걸친 작가 경력의 초기 단계에서, 1930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까지, 워는 밝은 젊은이들 세대의 소설가였다. 그의 첫 두 소설인 『쇠퇴와 몰락』 (1928)과 『사악한 육체』 (1930)는 독자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너무나 환상적인 상황에서 평면적이고 기본적으로 믿을 수 없는 등장인물들로 채워진 헛된 사회를 희극적으로 반영한다.[210] 초기 소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워의 특징은 참여자를 쉽게 식별할 수 있는 빠르고 출처가 불분명한 대화이다.[16] 동시에 워는 "전쟁과 젊은 세대"와 같은 진지한 에세이를 썼는데, 그는 자신의 세대를 "미치고 불임한" 사람들로 비난했다.[211]

워의 가톨릭 개종은 그의 다음 두 소설인 『검은 혼돈』 (1934)과 『한 줌의 먼지』 (1934)의 성격을 눈에 띄게 바꾸지는 않았지만, 후자 소설에서는 광대극의 요소가 억제되었고 주인공 토니 라스트는 코믹한 암호라기보다는 인식할 수 있는 인물이다.[16] 가톨릭을 주제로 한 워의 첫 소설은 미사의 불변성에 관한 단편 소설 "심해에서" (1933)였다.[212] 1930년대 중반부터 그는 언론인과 저널리즘에 관한 소설인 『스코프』(1938)로 이전 방식을 되돌렸다.[214]

8. 2. 가톨릭 소설

에블린 워의 가톨릭 개종은 그의 소설에 큰 영향을 미쳤다.[16] 초기에는 밝은 젊은이들 세대를 풍자하는 희극적인 소설을 썼으나, 개종 이후에는 종교적, 철학적 주제를 다루기 시작했다.[210][211]

워의 초기 소설인 『쇠퇴와 몰락』(1928)과 『사악한 육체』(1930)는 덧없는 사회를 희극적으로 묘사했다.[210] 『검은 혼돈』(1934)과 『한 줌의 먼지』(1934)에서도 이러한 경향이 이어졌지만, 후자에서는 광대극 요소가 억제되고 주인공이 좀 더 현실적인 인물로 그려졌다.[16]

가톨릭을 주제로 한 첫 소설은 단편 소설 "심해에서"(1933)였다.[212] 1930년대 중반에는 언론인과 저널리즘에 관한 소설 『스코프』(1938)를 발표했다.[214]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1945)는 워가 자신의 보수적인 종교관과 정치관을 명확하게 드러낸 첫 소설이다.[16] 그는 ''라이프'' 지 기고문에서 "등장인물을 순수한 추상으로 만들어서 [소설에서] 신을 제외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앞으로의 소설은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표현하는 시도"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216] 소설 『헬레나』(1950)는 워의 가장 철학적인 기독교 서적이다.[217]

『브라이즈헤드』에서 나타난 프롤레타리아 하급 장교 호퍼는 "평범한 사람들의 시대"에서 평범함의 부상을 보여주는 주제를 드러낸다.[16] 3부작 『명예의 칼』(『군인들』, 1952; 『장교와 신사』, 1955; 『무조건적인 항복』, 1961)에서 평범함은 사기꾼 "트리머"로 의인화된다.[218]

8. 3. 전쟁 소설

에벌린 워는 초기 에세이에서 "소설가에게 그가 관찰한 것을 단순히 베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가정하는 것보다 더 모욕적인 것은 없다"고 썼다.[16] 그는 독자들에게 작가가 소설 속 등장인물이 표현하는 의견에 동의한다고 추정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207] 그럼에도 불구하고, 앤 파스터나크 슬레이터는 『완전 단편 소설』 서문에서 "사회적 편견과 그것을 표현하는 언어의 묘사는 워가 동시대 세계를 세심하게 관찰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클라이브 제임스는 워에 대해 "누구도 그보다 더 자연스럽고 우아한 영어를 썼을 리 없다... 수백 년에 걸친 꾸준한 발전이 그에게서 절정에 달했다"고 평가했다.[208] 문학 평론가 앤드류 마이클 로버츠는 그의 재능이 발전하고 성숙해지면서 "우스꽝스러운 감각과 잘못된 태도를 드러내는 훌륭한 재능"을 유지했다고 말했다.[209]

40년에 걸친 작가 경력의 초기 단계에서, 1930년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까지, 워는 밝은 젊은이들 세대의 소설가였다. 그의 첫 두 소설인 『쇠퇴와 몰락』 (1928)과 『사악한 육체』 (1930)는 헛된 사회를 희극적으로 반영한다.[210] 초기 소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워의 특징은 빠르고 출처가 불분명한 대화이다.[16] 동시에 워는 "전쟁과 젊은 세대"와 같은 진지한 에세이를 썼는데, 그는 자신의 세대를 "미치고 불임한" 사람들로 비난했다.[211]

워의 가톨릭 개종은 그의 다음 두 소설인 『검은 혼돈』 (1932)과 『한 줌의 먼지』 (1934)의 성격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지만, 후자 소설에서는 광대극의 요소가 억제되었다.[16] 1930년대 중반부터 그는 언론인과 저널리즘에 관한 소설인 『스코프』(1938)로 이전 방식을 되돌렸다.[214]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는 에블린 워가 그의 보수적인 종교적, 정치적 견해를 명확하게 제시한 첫 번째 소설이다.[16] ''라이프'' 잡지 기사 "팬들의 환호" (1946)에서 워는 "등장인물을 순수한 추상으로 만들어서 [소설에서] 신을 제외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고, 그의 미래 소설은 "나에게는 오직 한 가지만을 의미하는 인간을 더 완전하게 표현하려는 시도, 즉 신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표현하는 시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216]

『브라이즈헤드』에서 프롤레타리아 하급 장교 호퍼는 워의 전후 소설에서 지속되는 주제, 즉 "평범한 사람들의 시대"에서 평범함의 부상을 보여준다.[16] 3부작 『명예의 칼』(『군인들』, 1952; 『장교와 신사』, 1955; 『무조건적인 항복』, 1961)에서 평범함은 사기꾼인 "트리머"에 의해 의인화된다.[218] 소설 『스콧-킹의 현대 유럽』 (1947)에서 워의 미래에 대한 비관론은 "나는 소년을 현대 세계에 적합하게 만드는 것은 정말 매우 사악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교사의 훈계에 담겨 있다.[219] 마찬가지로, 이러한 냉소주의는 안락사가 정부의 사회 서비스에서 가장 많이 요구되는 복지 국가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 『폐허 속의 사랑』 (1953)에도 스며들어 있다.[220] 워의 마지막 소설 "바실 실은 다시 달린다" (1962)는 전전 소설의 등장인물을 특징으로 하며, 워는 이 작품이 "청년기의 방식을 되찾으려는 노년의 시도"라고 인정했다.[221]

8. 4. 기타 작품

클라이브 제임스는 "누구도 그보다 더 자연스럽고 우아한 영어를 썼을 리 없다"라고 평가했다.[208] 문학 평론가 앤드류 마이클 로버츠는 워의 재능이 발전하면서 "우스꽝스러운 감각과 잘못된 태도를 드러내는 훌륭한 재능"을 유지했다고 말했다.[209] 워는 초기에는 밝은 젊은이들 세대의 소설가였으며, 『쇠퇴와 몰락』 (1928)과 『사악한 육체』 (1930)는 희극적으로 헛된 사회를 반영한다.[210] 초기 소설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워의 특징은 빠르고 출처가 불분명한 대화이다.[16]

가톨릭 개종 이후, 『검은 혼돈』 (1934)과 『한 줌의 먼지』 (1934)에서는 광대극 요소가 억제되었다.[16] 1930년대 중반에는 언론인과 저널리즘에 관한 소설인 『스코프』(1938)를 썼다.[214] 『중단된 작업과 기타 이야기』에서는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에서 채택할 문학적 스타일을 예고했다.[215] 『브라이즈헤드』는 워가 보수적인 종교적, 정치적 견해를 명확하게 제시한 첫 번째 소설이다.[16] 『헬레나』 (1950)는 에블린 워의 가장 철학적인 기독교 서적이다.[217]

『브라이즈헤드』에서 프롤레타리아 하급 장교 호퍼는 평범함의 부상을 보여주는 주제를 드러낸다.[16] 3부작 『명예의 칼』(『군인들』, 1952; 『장교와 신사』, 1955; 『무조건적인 항복』, 1961)에서 평범함은 "트리머"에 의해 의인화된다.[218] 소설 『스콧-킹의 현대 유럽』 (1947)에서 워의 비관론이 드러난다.[219] 이러한 냉소주의는 『폐허 속의 사랑』 (1953)에도 나타난다.[220] 『길버트 핀폴드의 시련』 (1957)은 "일종의 가짜 소설, 게임에 대한 교활한 초대"와 같다.[16] 워의 마지막 소설 "바실 실은 다시 달린다" (1962)는 전전 소설의 등장인물을 특징으로 한다.[221]

9. 평가 및 유산

에벌린 워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인 《쇠퇴와 몰락》(Decline and Fall)은 아널드 베넷이 이브닝 스탠다드에서 "타협하지 않고 기발하게 악의적인 풍자"라고 격찬했다.[223] 2년 후 출간된 《타락한 육체》(Vile Bodies)에 대한 비평적 반응은 더욱 열광적이어서, 레베카 웨스트는 워가 "자신의 시대를 빛낼 인물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16] 그러나, 후에 걸작으로 널리 인정받은 《먼지 한 줌》(A Handful of Dust)은 작가 스스로의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비평가들로부터 보다 미온적인 환영을 받았다.[224] 시릴 코놀리는 이 책에 대한 첫 반응으로 워의 능력이 쇠퇴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이 견해를 수정했다.[226]

1930년대 후반, 워가 가톨릭 및 보수적 논쟁에 경도되면서 일반 독자들 사이에서 그의 입지가 흔들렸다.[16] 《에티오피아의 워》(Waugh in Abyssinia)의 친파시스트적 어조는 독자와 비평가들을 불쾌하게 했고, 미국에서의 출판을 막았다.[228] 1938년, 《특종》(Scoop)이 워의 초기 코미디 스타일로의 복귀를 보여주자 비평가들은 대체로 안도했다. 비평가들은 그의 재치가 당파성과 선전에 의해 대체되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었다.[16]

1942년, 워는 종이와 인쇄에 대한 전시 제약에도 불구하고 좋은 판매고를 올린 《더 많은 깃발을 세우세요》(Put Out More Flags)로 명성을 유지했다.[229] 그러나 3년 후 출간된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Brideshead Revisited)에 대한 대서양 양쪽에서의 대중적 반응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브라이즈헤드》가 미국의 북 오브 더 먼스로 선정되면서 미국 판매량이 급증하여 종이 부족에 시달리던 영국에서의 판매량을 압도했다.[230] 대중의 열광에도 불구하고 비평적 의견은 갈렸다. 《브라이즈헤드》의 가톨릭적 입장은 워의 초기 소설을 따뜻하게 칭찬했던 일부 비평가들을 불쾌하게 했다.[231] 1959년, 출판사 채프먼 앤 홀의 요청과 일부 비평가들의 의견을 고려하여, 워는 책을 개정하고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가장 심한 부분들을 수정했지만, 책의 필수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완전히 없애지는 않았다."[237]

"팬 페어"(Fan Fare)에서 워는 자신의 미래 책들이 종교적 주제 때문에 인기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했다.[16] 1950년 출판된 《헬레나》(Helena)는 대중과 비평가들로부터 무관심한 반응을 얻었는데, 비평가들은 20세기 여학생 속어와 경건한 문체의 어색한 혼합을 비난했다.[238] 그러나 워의 예측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모든 소설은 계속 출판되었고 판매량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1957년 《데일리 익스프레스》와의 성공적인 소송 과정에서, 워의 변호인은 그 당시까지 총 4백만 부 이상의 책이 판매되었으며, 그중 3분의 2가 영국에서, 나머지는 미국에서 판매되었다는 수치를 제시했다.[239] 그의 전쟁 3부작 중 첫 번째 권인 《무장 병사들》(Men at Arms)은 1953년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상을 수상했다;[240] 초기 비평은 미온적이었으며, 코놀리는 《무장 병사들》을 샴페인이 아닌 맥주에 비유했다.[241] 코놀리는 나중에 그의 견해를 바꿔 3부작을 "전쟁에서 나온 최고의 소설"이라고 불렀다.[242]

1973년, 워의 일기는 1976년 책으로 출판되기 전에 ''옵저버''에 연재되었다. 그의 사생활, 생각, 태도에 대한 폭로들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워는 옥스퍼드 시절과 첫 번째 결혼에 관련된 당혹스러운 내용을 삭제했지만, 적들에게 그를 편협하고, 속물적이며, 가학적이고, 뚜렷한 파시스트적 성향을 가진 작가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투영하기에 충분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16] 워의 지지자들은 이 그림 중 일부가 일기 편집 부실과 워를 작가에서 "인물"로 변모시키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246]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를 괴물로 여기는 대중적 인식이 형성되었다.[247] 1980년, 그의 편지 모음이 출판되었을 때, 그의 평판은 더 많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필립 라킨은 ''가디언''에서 이 컬렉션을 검토하면서, 워가 엘리트주의적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248]

캐슬 하워드, 요크셔, 1981년 텔레비전 시리즈와 2008년 영화에서 "브라이즈헤드"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일기와 편지의 출판은 워와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을 높였고, 많은 새로운 자료가 출판되었다. 크리스토퍼 사이크스의 전기가 1975년에 출판되었고, 1980년에서 1998년 사이에 세 권의 전기와 다른 전기 및 비평 연구가 계속해서 출판되었다. 1983년에는 워의 저널리즘과 평론 모음이 출판되어 그의 생각과 신념의 더 완전한 범위를 보여주었다. 새로운 자료는 워의 지지자와 비판자 사이의 논쟁을 더욱 부추겼다.[16]

1981년 그라나다 텔레비전의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 각색은 영국과 미국에서 새로운 세대에게 워의 작품을 소개했다.[247] 워의 소설에 대한 이전의 텔레비전 각색도 있었는데, 1967년 BBC에서 ''명예의 검''이 연재되었지만, 그라나다의 ''브라이즈헤드''의 영향은 훨씬 더 광범위했다. 사라진 잉글랜드식 삶에 대한 향수 어린 묘사는 미국 대중 시장에 어필했다; ''타임'' 매거진의 TV 평론가는 이 시리즈를 "시로 만들어진 소설"이라고 묘사하고, "역대 최고의 TV 쇼 100선"에 포함시켰다.[249] 워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는 1988년의 ''먼지 한 줌'', 2003년의 ''비열한 육체'' (''브라이트 영 씽즈''로 영화화됨)와 2008년의 ''브라이즈헤드 리비지티드''가 있다.

그레이엄 그린은 워가 사망한 직후 ''더 타임스''에 보낸 편지에서 그를 "내 세대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인정했으며,[252] ''타임'' 매거진의 부고 기자는 그를 "현대 영국 산문의 위대한 노장"이라고 부르며, 그의 소설은 "비평가 V. S. 프리쳇이 '그의 악의의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을 음미할 수 있는 독자가 있는 한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53]

10.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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